'책-영화-음악'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4.04 하루키, 코엘료, 그리고 영화 About Time
  2. 2014.03.16 '앵무새 죽이기'

오늘은 감정을 통제하기 쉽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날은 작업이 잘 되기도 하는데 통 신통치 않아 일을 중단하고 책 2권과 밤엔 영화 하나를 봤다. 하루가 거지 같다고 느끼는 40대 이상 장년에게 오늘 내가 몸소 체험한 기가 막힌 감정의 재생 방안을 제안한다.

1. 먼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 예를 들면 오늘 집에서 우연히 찾은 ‘상실의 시대 같은 책.’ 이런 책으로 거지 같은 감정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 오래 붙들고 읽지 말아야 하고 새 책을 구매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칫하면 허무의 늪에 빠진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30분 속독으로 본다. 줄거리는 인터넷을 통해 파악하면 속독 가능하다. 

2. 난 하루키가 쓴 책 중에 아마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에세이집만을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 같다. 그건 킨들로도 읽고 책으로도 읽었다. 그 책에서 전달되는 감성적 일상이 다 내 것 같아서 그의 다른 에세이도 읽었다. 그러나 대부분 신통치 못했다. 그의 소설은 더 최악이다. 주인공은 누군가를 찾는다. 떠난다. 존재의 모험이랄까? 그러나 출구는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겉돈다. 자아를 자각하고 절망을 인식하고 위로와 재생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게다. 그러나 난 그냥 텅 빈 느낌을 갖는다. 책을 내팽개친다.

3. 다음은 파울로 코엘료의 글를 읽는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읽은 ‘흐르는 강물처럼’ 같은 에세이 말이다. 그의 글은 쉽고 일관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아마도 거지 같은 감정에 재활이 시작되는걸 느낄게다. 평단이 그에 관해 어떤 비평을 하든 신경 쓸 것 없다. 코엘료의 글은 따뜻한 감성이 있고 작가의 일상과 크고 작은 꿈 이야기가 있다. 여행이 있고 순례자적인 삶의 여정이 소개된다. 위선과 거짓을 고발하면서 겉돌지 않는다. 선명한 목적지향성이 있다. 지금 당장 어딘가 며칠 여행을 간다면 난 코엘료의 책을 가져갈게다. 내가 만약 작가로 살아갈 수 있다면 코엘료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는 유신론자로 삶의 위대함과 자유의 간절함을 위트있게 노래한다.

4. 코엘료의 글로부터 하루가 현재가 귀하고, 사랑이 가장 아름다우며, 불확실한 삶의 여정에 대해서도 애착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책을 그만큼 읽었다면 벌써 늦은 밤이 될게다..) 자기 전에 ‘About Time' 영화를 보라. 2013년 한국에서도 개봉된 로맨틱 코메디다. 그런데 거지 같은 날에 하루키의 소설 -> 코엘료의 에세이를 거치면 삶의 단면을 사랑의 내러티브로 성찰할 수 있는 철학적인 영화로 변모한다. 사랑스런 대사가 너무 많다.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며, 아들이고 다시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일상이 어쩌면 코엘료의 에세이와 이렇게 궁합이 잘 맞는지. 오늘 난 운이 좋았다. 주의사항이 있다면 레이첼 맥아담스에 너무 빠지면 안된다. 지나치게 사랑스런 여인이다. 영화의 이미지는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가끔 독이 된다. 

5.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남녀주인공이 처음으로 만나 말을 교환할 때이다. 초면에 서로 얼굴을 전혀 보지 못하는 깜깜한 카페에서 서로에게 말을 나누며 남녀는 호감을 갖는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시각적, 혹은 공학적 매체를 통한 재현도 없다.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방향감각을 유도하는 어떤 발판도 없는, 실제 영화 화면에서도 그냥 깜깜한 상태에서 말만 교환되는 1-2분 정도의 시간 동안 아주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어떤 시각적 형상화도 없을 때 나눠지는 (사랑의) 언어였다. 어떤 현실을 규정하거나 암시하는 메타포가 전혀 없을 때 나눌 수 있는 언어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6. 이렇게 생각해보자. 해리포터를 영화나 기타 재현으로 처음 본 사람, 책으로 보고 영화를 본 사람, 책으로만 읽은 사람, 누군가의 구술로 책 내용을 들은 사람은 각각 모두 해리포터에 관한 다른 사고체제를 갖는다. 내 매체 경험으로는 시각/공학적 경로로 재창조된 해리포터(의 이미지만)을 본 사람이 얼핏 생각하면 가장 화려하게 해리포터를 기억할 것 같지만 가장 한정적이고 탈맥락적이며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시대적 풍조에 의해 축소되고 채색된 방식으로 해리포터를 암기하고 있는 셈이다. 화려한 멀티미디어, 모바일컴퓨터,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호들갑이지만 비본질을 본질로 호도한다면, 꼬리로 몸통을 뒤흔든다면 언어를 통한 변화와 회복은 사실상 없다.

7. 잠깐.. 거지 같은 날의 재활안을 제안하다가 다시 전공 분야로 글이 새고 있다. 정말 좀 회복이 되었나 보다. 아직도 비가 조금 내리는 것 같다. 비가 오는 날은 잠이 잘 온다. 이제 자야겠다.

Posted by jacob12

1. 행복의 리츄얼은 구체적인 오감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일요일 오후에 약간은 벅찬 마음으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익숙한 개 냄새를 맡으며 산책을 시킬 때.. 그리고 약간 나른한 몸으로 소파에 늘어지게 눕곤 하겐다스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쪽쪽 빨아 먹으며 내가 좋아하는 슈퍼스타k 오디션 방송을 보는 것. 한참을 보다가 시계를 쳐다본다. ‘이제 20분이면 끝나네.. 심사평이 궁금한데..’ 그러면서 그 시간이 계속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 행복은 메타포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런 리츄얼의 묘사가 필요하다.


2. 난 ‘앵무새 죽이기’를 읽으며 책 읽기에 관한 행복의 리츄얼을 마음껏 누렸다. 이런 저런 달달한 쥬스나, 레모네이드, 커피를 마시면서 천천히 읽었다. 가끔 호떡이나 감자전도 먹었다. 행복한 상상도 하고 메모를 해두고 몇 가지 글도 추가로 읽었다. 그런 중에 몇 가지 중요한 결정도 했다. 멋진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보면 행복감에 겨워 ‘아, 끝나지 않았으면..’ 그런 느낌이 스칠 때가 있다. 빨리 다 읽고 싶지 않았다. (빨리 다 읽어봐도 다시 곧 뭔가를 읽을것이기 때문에..) 행복한 마음으로 아주 천천히 읽었다. 


3. 한번 좋았던 책이 세월이 지나도 왜 이렇게 또 다시 좋을까? 아니, 더 절실하게 좋다. 우리 개인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나는 지금의 나와 사실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아마도 10년 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게 허락된 것이 있다. 나이가 들며 그걸 더 정직하게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좋았던 건 계속 좋은 것이다.

 

4. 아티커스 핀치 변호사 얘기만 간단히 나누고 싶다. 이 책에서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백인-남성 중심의 사고이다. 젬이 진흙과 눈으로 만든 잡종 눈사람의 메타포로 백인성과 다른 개인들에 대한 차별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앵무새 죽이기의 아티커스 핀치는 비-백인을 보호하는 거창한 인권 변호사는 아니다. 그러나 변호사 업무를 감당하며 기존 체제의 부당함에 대해 진실되게 고민하고 갈등한다.

 

5. 비평가들은 그가 남부의 보수적 전통을 수용할 뿐 아니라 부당한 인종주의의 현실을 사실상 묵과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사회구조 개혁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흑인의 권리를 변호하는 과정에 또 다른 사회적 계급(‘백인 쓰레기’)이나 여성에 대한 편견이 부적절하게 활용되었다고도 지적받는다. 이걸 좌파적 관점에서 보면 Jim Crow liberal(자유주의자)의 한계로 볼 수 있다.

 

6. 그러나 1930년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분리, 특히 알라바마 주의 시대 상황에서 아티커스 핀치의 행동은 내게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최선이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시대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으로 다가온다. 다수 사람들이 다수 의견을 전체 의견으로 단정하는 곳에서 소수자에 대해 소수의견을 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지 나는 너무나 잘 안다.

 

7. 그는 그가 살아온 시대와 장소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난 그와 같은 작은 내러티브가 결국 다른 세상으로의 물꼬를 트는 정책과 법안을 허락했다고 믿는다. 난 혁명은 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변화를 더 신뢰하며 우리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각자가 양심과 개성, 사랑과 행복의 본질을 내러티브로 옮기는 일에 더 집중할 때 세상의 본질이 결국 변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냉정한 인종차별주의의 정서를 보여준다. 그러나 차별이 없어질거란 희망의 내러티브가 계속 등장한다. 이와 같은 스토리가 다시 남겨지고, 나눠지고, 누군가 다시 쓰고 공유하면서 차별은 정말 없어진다. 대립, 전쟁, 단절의 정책으로 새 세상을 올거라 난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마음, 시대 문화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8. 나는 단절과 대립이 아니라 포용과 절충을 더 신뢰한다. 아티커스 핀치 변호사는 당시 남부의 전통을 적대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을 깜둥이 애인이라고 비아냥댄 이웃의 듀보스 할머니도 또 다른 삶의 단면에서 보면 남부의 전통을 지키고 개인의 숭고함을 지킨 위대한 인생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그는 관대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삶의 다양성, 의견의 차이, 역사의 흐름을 양가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를 갖는다. 과거의 전통과 사회규범을 존중하면서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양심에 따라 변화를 지향하는 타협적, 절충적 자세를 갖는 것이다.

 

9. 마찬가지로 내 의견이 아니면 다 틀렸다는 극단주의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핀치 변호사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와 다르면 대립되는 세상에 나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신중하고 회의적으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모습은 내가 지금 내 영역에서 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10.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 걸 30-40대가 지나면서 난 알았다. 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언어-교육에 관한 여러 정책 입안에 참여했는데 뭘 만들거나 세우면 고구마 줄기처럼 다 따라올 거라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기존체계를 부정하거나 대립시키고는 세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상호공존, 타협, 시민의식 등은 쉽사리 전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11. 나는 스스로 절충적 회색주의자라고 소개하고 진리는 회색지대에 있을 것이고 진리를 좇는 것 역시 맥락적이고 개인적인 절충과 타협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어디서든 줄을 좀처럼 서지 않으려 하며 나도 모르게 줄에 서 있다면 곧장 발을 빼곤 한다. 어느 집단이든 충성을 바치는 열혈 구성원도 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내 삶과 앎의 영역에서 글과 말로 양심적인 지식인이 되기를 소망하며 다수든 소수든 개인/언어의 권리를 지켜지지 않는 곳을 경계하고 고발하는 사회적 활동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12. 억울하게 소송되고 죽어버린 흑인 탐에 대해 불편하고 분노하는 다른 흑인들의 심경을 이해하기는커녕 예수님은 한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며 질책하는 사교회의 백인부인들의 자세가 어떻게 보이는가? 유태인을 차별한 히틀러를 비난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막상 법정에서는 흑인에 대해 차별적으로 발언하는 게이츠 선생님는 어떤가? 우린 사실 어쩌면 그렇게 지금도 살고 있는 것 아닌가?

 

13.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자를 무참히 억압시켰던 기독교의 큰 역사가 그나마 복음의 빛으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아티커스 핀치와 같은 작은 용기와 양심이 모였기 때문이라고 난 믿는다. 앞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위정자의 정책, 권력자의 강력한 입법이 아니다. 앵무새를 죽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더 모여야 우린 그 만큼 변한다. 

Posted by jacob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