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신문을 통해 전해진 세상 얘기다. 목동에 있는 중학교 2학년 동급생들에서 왕따를 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다(중앙일보 201227목동 왕따자살 여중생, 대체 어떻게 괴롭혔기에’). 법원에서 폭력성이 두드러지지 않고 중학교 2학년 학생을 감안한다고 하면서 가해학생들에 대한 영장 청구를 기각했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학교짱을 포함한 8명이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김양을 ‘XX이라고 욕을 하고, 필통이나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김양 부모님이 학교측에 항의를 하자 이를 알아차리곤 더욱 노골적으로 왕따를 시킨다. 교실에서 "학교에서 무슨 일 생기면 부모에게 이르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애가 있네, 그 아인 이제 죽었네"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전체 학생들에게 동조와 침묵을 강요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양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하기 바로 몇 시간 전에도 그들은 김양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며 "우리에게 붙어있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더럽게 냄새 난다" "X같은 년, XX" 라고 욕을 하며 수차례 폭행을 했다.

 

이처럼 어른들은 말할 것 없고 아이들도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왕따를 시킨다.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부터, 주먹을 쥐고 위협하는 몸동작, 굴욕감을 주는 언어를 사용하는 청소년들. 그들은 대체 어디서 누군가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음으로 내모는 소통의 기술을 배웠을까? 그들이 어느 구별된 장소에서 작정하고 학습한 언어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게다. 그들에게 언제나 노출된 위계적이고 위협적인 일상의 언어문화를 교실이나 온라인 매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적용했을 뿐일 것이다.

 

언어는 그처럼 잔인하게 우리에게 굴욕감을 안기고 위축된 관계를 강화시키고 결국 죽음을유도할 만큼 위협적인 무기가 된다. 그래서 우린 언어를 잘 가르치고 잘 배워야 한다. 관련 연구자라면 순진하게 언어의 중립적이거나 선한 속성만 전할 것이 아니라 양날의 검과 같은 언어의 사회적 단면을 세상 사람들에게 경각시켜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선 대체 말이든 글이든, 1언어든, 2언어든 언어를 도대체 여전히 어떻게 인식하고 교육시키고 있는가? 목동 왕따 자살사건이 보도될 즈음에 영화배우 문근영이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필수 요건 중 하나인 토익 750점을 획득하기 위해 학구열을 불태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방송이나 영화 출연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문근영의 성실함을 다들 칭찬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체 영어공부 시킨다고 모든 졸업생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졸업인증제도의 획일성이 답답하기만 하다. 특정 영어시험의 성적을 모두에게 제출하게 하는 일종의 관료적 발상 말이다.

 

토익을 졸업인증으로 공부시키는 곳이 어떤 언어를 배우는 곳이라고 상상되는가? 이런 상상을 해보자. 미국 UCLA에서 인근 지역의 Spanish 화자 수가 급증할 뿐 아니라 거주민이 관련 언어로 경제-정치적 협력을 해야 할 일도 빈번해지니 전교생을 대상으로 Spanish 학습을 강화하고 Spanish 시험을 치루게 하면서 특정 시험점수를 모든 재학생에게 요구한다. 그 곳 대학에 재학 중인 영화배우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왜 한국 대학에서 그렇게 하는 건 아직도 매우 당연하게 허락되는가?

 

다시 학교 왕따와 폭력 사건으로 돌아와 보자. 같은 해 경찰은 작정하고 학교폭력, 일진회와 전쟁을 선언한다. 학교의 문제아들이 사고를 치고 있다. 그래서 관리를 강화한다. 정문에 경찰을 배치한다. 적발된 폭력행위에 징계 수위를 높인다. 학교 안에 CCTV를 더 설치한다. 그 뿐 아니다. 폭력을 방조한 현직교사에게 책임을 묻는다. 실제로 교사가 몇 명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지금 2년여 시간이 지나며 학교폭력은 줄었다고 보는가? CCTV가 없는 곳, 경찰이 지키지 않는 곳, 교사가 없는 곳에서 억누르는 징벌을 피해 다니는 신종 폭력이 더욱 확장되고 있지 않는가? 우린 다 안다. 관리를 강화하고 개인을 징벌하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진 폭력의 언어, 관계의 폭력을 바로 잡으려면 시간과 노력을 한없이 쏟아 부어야 한다. 지금 교사-학생, 학생-학생 문화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언어는 어쩌면 폭력이라고 인식되고 있지도 않다. 누군가 학교 가서 교사와 학생들 말을 녹취해서 분석을 해보라. 아마 폭력의 언어는 일상이고 관계의 폭력은 관행이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체화된 폭력적인 언어를 바꾸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건 개인을 징벌하는 문제로 해결되지 않는다. 공부와 시험에 전념해야 하는 학교문화, 담임마저도 아이들과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수업시간에도 아이들이 또 다른 아이들의 스토리를 듣고 공감하고, 읽고 다시 써보는 연습이 없는 곳. 언어를 기호로 크게 규정하더라도 아이들은 여전히 자연이나 생태적 경험을 통해, 음악이나 미술이란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감정을 공감할 기회가 줄고 있는 곳. 거기서 어찌 생명의 언어, 회복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언어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러니 사회적 캠페인이 서둘러 작동되어야 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남과 달라도 동등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법안이 만들어지고, 자신의 스토리나 보고 듣고 읽은 스토리를 누군가에게 처음부터 길게 말하고 청자는 그걸 끝까지 듣는 교육내용이 시작되어야 한다. 법안도 바뀌고, 제도도 바뀌고, 교육도 바뀌고, 그렇게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 노력을 탈 많고 문제 많은 아이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2언어를 포함해서 말과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삶이고 정체성이란 교육목적이 공유되어야 하고, 그런 것이 언어교실에서 교재, 평가, 교육과정에서도 다루는 노력이 있을 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결코 징계, 관리, 효율성 기반의 전문가 시스템의 개선만으로는 폭력과 죽음의 언어를 끊을 수 없다.

 

솔직해져보자. 일진회 조직이 정말 사라질 수 있을까? 일진회 조직과 전쟁을 선포한 경찰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난 경찰이 전쟁에서 이겨도 그게 더 겁난다. 경찰이 폭력의 문화, 응징의 관계를 개선시킬 순 없기 때문이다. 폭력의 언어는 폭력의 관계에서 나온다. 비싼 좌석에 앉아 있다고 승무원에게 수차례 라면을 끓어오게 하다 결국 잡지책으로 승무원 머리를 때리는 나라에선 언어를 통해 평등, 개인의 권리, 공존의 공동체를 가르치지 못한다. 일진회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경찰이 잡아낸 일진회는 방산의 일각일 뿐이다.

 

일진회에서 따 당하지 않아도 자살하는 아이들은 뭔가? 일진회 사건으로 떠들썩할 즈음에 수개월 동안 서울 강남 지역에서 학생들이 성적 비관과 학교 부적응 등을 이유로 투신 자살한 사건이 잇따라 보도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 한명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자신의 컴퓨터에 '학원 다니기가 힘들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자살의 심리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 어린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 몬 절망감을 알 수 있다. 뭔가 말하고 싶은게 있었을 터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걸고 그걸 끝까지 들어주었다면, 괜찮다고 괜찮다고 서로가 대화를 두런 두런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면 자살의 극단은 우선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야기를 걸고 그걸 들어줄 누군가가 왜 이리 없는가? 놀이터도 비어 있고, 방학 중에도 바쁘고, 학교에서도 짬을 못낸다고 한다. 느리거나 다르게 걸어가면 세상에 유명한 독설 멘토들이 힘을 내고 달리고 방향을 빨리 찾으라고, 그리고 자기발전의 역량을 갖추라고 다그친다. 그냥 좀 느긋하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거나 내 이야기를 나눌 관계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는데 일단 달리고 보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꾸 죽는다. 점점 더 많이 죽고 있다. 안 죽고 살릴 만한 학생들도 여기저기서 죽는다. 그렇다고 교육자라는 사람들이 뭘 안하는 건 아니다. 수능 준비서적도 만들고 멀티미디어 프로그램 만들어서 공부 편하게 하도록 돕기도 한다. 아무튼 뭘 하는지 점점 더 바쁘다. 다 중요한 일이라 치자. 그래도 사람 살리는 일이 지금 제일 중요하다. 9명 살고 1명 죽으면 죽은 1명은 얼치기이고 살아난 9명은 안전한 세상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1명 죽을 때 9명이 걱정하고 살리자고 하지 않으면 남은 9명도 두 번째 죽어갈 1명이 될 수 있다.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 몸은 살고 있어도 영혼은 다 죽는다.

 

부자가 되지 않아도, 공부를 좀 못해도, 지방에서 살아도, 늙어가도, 외국에서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라도, 남들과 생김새가 달라도, 그래도 죽거나 죽을 만큼 괴롭지 않은 세상이 되어야 한다. 언어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곳에서도 그래서 생명, 생태, 공존, 권리, 정체성, 치유를 고민해야 한다. 그걸 감당할 정책, 평가활동, 교육과정, 제도를 고민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 타자들의 공존, 생태적 타당성을 고민하는 사회적 캠페인이 시작되어야 한다. 연구자들 역시 사회적 단면을 칼로 잘라버린 반사회적, 비사회적 연구주제만을 복제하듯 계속 찍어낸다면 사실은 사회적 죽음을 방조하는 셈이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목 매고 죽는 건 아니라도 말이다.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다. 아이들이 죽이고 죽고 있다. 2년 전 보도기사를 보니 지금과 다를 건 없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간다.

 

Posted by jacob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