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들은 둥지를 언젠가는 떠난다우리들의 그 착한’ 아들들이 난생 처음으로 문을 꽝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갈 때 엄마 뿐 아니라 아빠도 당황스럽지만 (아니화가 나려고 하지만그건 사실 아들의 입장에서는 부모 품 안의 심리적 둥지를 떠나는 위대한 출발인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을 때 박수 쳐주고 파티해주면서 이렇게 말할 걸 그랬다. “너 이제 little boy가 아니던데.. 이제 괜찮아?” 정말 쿨한 아빠 아닌가?)

 

2. 예전에 내가 아는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했다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두 번의 위기를 피할 수 없는데 한번은 우리가 틴에이저일 때이고다른 한번은 틴에이저 자녀를 둘 때라고그 땐 그 말에 공감을 했는데 지금 그 분의 논점을 생각해보면 자녀에 관한 소유의식이랄까책임감이 대단했던 분 같다. “넌 대체 왜 그러니내가 널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데.. 내가 널 잘못 키웠나보다.” 뭐 이런 식.. 그 분의 자녀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자책감의무감 등의 부정적인 자아를 계속 내면화시켰을 것 같다.

 

3. 어디 자녀만 그런가우리들의 그 착하고 예쁜’ 아내들도 정신적인 독립을 선언하곤 한다.많은 한국인 아내가 남편에게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평생 의존하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4. 나는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가문에서그것도 경상도 대구에서 장손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남성남편아빠교수혹은 기타 직분 중심의 위계와 복종의 관계성에 아주 익숙하다그러나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공부하면서또 결혼하자마자 미국에서 살아가고 공부하면서많은 차이와 다양성을 학교 안팎에서 보고 경험하면서혹은 자유와 억압의 감정에 대해 연구자의 위치에서 학습하면서 내게 내면화되어 있던 꼰대 정체성을 조금씩 직면할 수 있었다.

 

5. 결혼하면서 시작된 가정 역시 언제나 내가 중심이었고 내가 가장 큰 책임감을 가졌다그러나 내심 배우자나 부모-자녀의 관계에서도 위계와 복종의 관계성이 강화되는 것이 늘 불편했다누가 다른 누군가를 책임지며 부담을 안고그 때문에 누군가가 의무감자책감을 부정적으로 안게 되는 역순환 말이다.

 

6. 그런 점에서 보면 지난 몇 년이 내겐 참 행복하고 감사한 때이다오랜 동안 내게 익숙한 위계와 복종의 관계성을 내 가정에서부터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미국과 한국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흩어져서 서로의 빈자리를 경험했고 각자는 자립을 연습해야 했다이젠 내가 박사이고 교수라도 아내나 자녀는 내 생각의 틀 안에서 절대로 복종되지 않는다내가 더 좋다고 생각되는 걸 가르치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들은 이미 풍성한 일상과 행복한 내면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때로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가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더 많곤 하다우린 다르고 각자 고유하다부부도 다르고 부모-자식도 다르다그런데 아무리 아빠이고 남편이라도 가족 구성원을 내 기준으로 순응시키면 그()의 개성과 독특함은 사라지는 것이다다 아는 진리 같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한국인 가정은 자녀와 배우자의 다름이 잘 존중되지 않는다.

 

7. 언젠가부터 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의존을 강요하기 보다는 각자 먼저 행복하기를 기대하고 배려한다이걸 어찌 보면 부부가 서로 무심해보인다 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의무감과 자책감이 종속된 느낌을 주지만 각자가 자기 신뢰를 할 수 있도록 도울 때는 자아 존중감이 훨씬 높아진다배우자가 자기 성취를 감당할 수 있도록 계속 지켜보면 생활은 더 불편할 수도 있다그러나 각자가 (미숙하더라도 귀하게 붙들고 있는일과 삶을 존중하는 만큼 그 가정은 앞으로 더욱 안전하고 행복할 것으로 믿는다.

 

8. 아내가 어디 전시회에서 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해서 차를 타고 몇 시간을 함께 다녀온 적이 있었다늘 그렇듯이 닫힌 차 안에서는 솔직한 감정이 나눠지는데 난 그런 고백을 했다집안은 예전만큼 깨끗하지 않고 냉장고 속 야채는 가끔 썩기도 하지만지난 20여년 동안 결혼하고 살아오면서 어쩌면 지난 몇 년 동안 보여준 당신의 모습이 가장.. 뭐랄까 자기다웠던 것 같아상을 받고 안 받고어느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안 받고그런 건 당신도 그렇지만 내게 중요하지 않아지금 참 행복하고 보기 좋아.”

 

9. 그건 뭘 말하는 것이었을까아마 난 그 때 아내의 정신적인 자립풍성한 일상의 즐거움미래를 위해 현실을 희생시킨다는 자책감 없이 지금 이 순간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 같다남이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하지 않고 아시안-여성-아줌마 학생으로 해보고 싶었던 것을 차분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시도해본 몇 년의 시간돌맹이철사종이진흙을 깎고 만지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그림을 보고 또 그리면서 클래식 음악을 듣고 또 고전을 읽으면서 아내는 분명 침묵의 시간을 건너 뛰어 성숙한 자기실현의 일상을 살고 있다. "하나님의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이같은 마음으로 뛰어놀고 싶다"는 그 말이 내게도 얼마나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10.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미국과 한국을 자주 오가면서 어디서도 안정적으로 소속되지 못한 불안정한 이방인 신분을 학습했다나는 심정적인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내 말에 동조하며 기러기 아빠로 사는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가족이 꼭 헤어져야 하나요?”라고 내게 위로했다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곤혹스런 순간의 총합은 컸을지 모르지만 감정간의 흐름은 늘 기대와 소망이었다당혹스러운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니 자립과 상호존중으로 함께 성숙해지는 시간이었다

 

11. 인생은 정말 곡선이고 역설이다나는 주사 맞듯이 아팠지만 지내보니 그 만큼 정신적으로 당당해진 것 같다우리 부부는 재정적으로나 관계에서 결핍을 느꼈지만 그에 반해 내면 안에 숨어 있던 자책감과 의존의 언어가 거의 사라졌다가족은 의존감으로 서로를 결속시키지 못한 만큼 자립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틈에서 각자가 자신만의 인생을 꿈꿨다. “너가 나한테 어쩌면 이럴 수가 있어..” 우린 상대방을 자책시키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12. 가정은아니 사랑하는 관계라면 누구나 권위와 주도권, 희생과 복종의 언어를 더 내려놓아야 한다내가 더 정의롭고더 많이 배웠고더 정황을 잘 판단하고 있는 듯해도 그렇지 않다또 내가 옳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뭐 어떠랴살아가는 복잡계에 그토록 명시적인 정답이 어디 있단 말인가본질을 지킬 수 있다면 비본질적인 것은 모두 관용을 품을 수 있다.

 

13. 미국에선 TV를 잘 보지 않아서 비교하기가 쉽지 않지만한국에서 본 TV 광고를 떠올려 보면 어떤 제품을 추천하기 전에 광고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불편해하고 창피해하는 장면이 아주 자주 나온다혹은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제품을 구매하는 모습도 나온다타자의 시선은 이처럼 자신이 가진 돈으로 제품을 구매하면서도 중요한 동기를 제공한다


14. 남의 시선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것아내와 나는 타자의 시선으로 행복감을 갖지 말자고 자주 얘기를 한다자녀를 키울 때도내 삶을 살아갈 때도어떤 결정을 할 때도나는 우리 각자에게 허락된 달란트소망믿음사랑의 몫과 색깔이 다 다르다고 생각한다내면을 바라보고상황 안에서 관용적인 판단을 하며좀 더 솔직하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용기를 가지려면 불필요한 권위와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15. 아들은 문을 꽝 닫고 방에 들어갈 수 있다아내는 좀 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획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감당할 것을 기쁘게 돕는다그러나 내가 가진 모두를 줄 수는 없다나도 내 삶의 계획과 방향이 있으니 말이다가끔 함께 기도하고 협력할 것을 제안한다그들이 수긍하고 함께 한다면 기쁘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불편하고 화낼 건 없다나는 아내의 주인이 아니다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시간이 지나면 그들에게 문을 열어줄 다른 이들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내 가치와 그들의 가치를 동일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선 부모가 자살할 때 자녀들도 같이 함께 자살하는 나라이다내가 잘못되면 내 아이들도 잘될 수 없다는 염려는 이해되지만 그건 한편으로 보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교만이다.)

 

16. 더 중요한 건 관용이고 사랑이다서로 자립하고 성장하며 사랑을 느끼며 느슨하게 결속되는 것이 의무자책희생을 교환하며 서로를 의존감으로 견고하게 결속시키는 것보다 더 낫다난 그걸 가정 밖에서도 적용하고 싶다동료와 우정을 나누고학생을 지도하고직장 안팎에서 일하고 살아가면서 그와 같은 자립심을 나누길 희망한다개성과 자유를 더 허락하고 싶다.

 

17. 인정 욕망도 더 버려야 한다스스로를 중심에 세우고주위 반응이나 기분을 살피는 욕망의 내면을 더 내려놓아야 한다물론 인정이 나쁜 건 아니다그러나 그와같은 욕망은 쉽사리 무기력우월감의 감정으로 과장된다. (갑자기출세라도 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외 없이 자기가 그만한 역량이나 자격이 있어서 그런줄 안다자신들은 몰라도 표정과 말투가 바뀐다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출세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자기연민이나 혐오가 너무 크다그러니 대부분의 관계에서 인정에 연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소유와 인정받음희생과 의무감자책과 화이런 감정의 스펙트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침묵의 시간은 밖으로 향한 시선이 나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Posted by jacob12